연애하지 않을 자유
💬 별루였다 딱히 재미있는 얘기 없었음
🔖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정치’는 랑시에르의 용어를 따른다. 자크 랑시에르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가 정치(politique)와 치안(police)라는 두 가지 번역 용례를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두 종류의 정치를 구별할 것을 주장한다. 통념적 정치활동은 후자, 즉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치안의 정치다. 한편 이러한 치안의 논리를 넘어서는 미학의 정치가 존재한다.
<정치의 논리는 자리들의 나눔(분배)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전체의 샘,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나눔을 흐트러뜨린다. 정치의 논리는 욕구들(이 지배하는) 어두운 삶에만 속해 있는 것으로 셈해지던 자들을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들로 보이게 만든다. 정치의 논리는 어두운 삶(에서 새어나오는) 소음으로밖에 자각되지 않았던 것을 담론으로 들리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내가 ‘몫 없는 자들의 몫’ 또는 ‘셈해지지 않은 것들을 셈하기’라고 불렀던 것들이다.> 자크 랑시에르
<랑시에르식으로 말하면, 정치적 투쟁이란 본래 복합적 이익 사이의 합리적 논쟁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정당한 상대자의 목소리로 인정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의 세계는 치안과 정치, 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굴러간다. 특정한 정치 체제는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발화만을 인간의 언어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정치적 자리와 몫을 할당하는 반면, 그 집단 외부의 사람들의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동물이 내는 소음으로 간주하며 그들에게 어떤 몫도 할당하지 않으려 한다.>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의 정치
이것은 정치체제가 존재의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분배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다. 정치는 이에 대항하여 특정 분배의 형식 속에서 제 몫을 전혀 갖지 못한 이들이 이견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밥그릇 싸움’이라고 폄하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정치적 투쟁은 밥그릇 싸움이다. 도대체 무슨 고상한 것을 위해서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가? 목소리를 내고, 지워졌던 정체성을 드러내며,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몫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정치적 투쟁이고 밥그릇 싸움이다. 마치 집 요정처럼 ‘보이지 않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던 청소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례나, 아동 및 성소수자 인권 개념도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치를 특정 정치체제 안에서 권력을 소유하는 문제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둘째, 몫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몫을 부여하는 새로운 분배 형식을 찾아가는 활동을 하나의 정치체제에서 다른 정치체제로의 이행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의 특징이 나타난다. 정치는 ‘일치(consensus)’를 넘어선 ‘불일치(dissensus)’의 분배 활동이라는 것이다.> 진은영, 앞의 글